[이코노뉴스=남영진 논설고문] 남미 파타고니아 빙하와 미국의 그랜드 캐니언 등 장엄한 풍경을 보고 귀국 다음날 4월 첫 토요일인 지난 7일 시차도 해결되지 않아 비몽사몽간에 대학 동창들과 인왕산 동쪽의 ‘수성동(水聲洞) 계곡’ 둘레길을 찾았다.

▲ 남영진 논설고문

서울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에서 사직단옆쪽을 지나 종로도서관 뒤의 활터인 국궁장을 지나서 인왕산 등산로로 들어가지 않고 오른쪽 샛길로 접어들었다.

행정구역으로는 종로구 옥인동이란다. 상명대에서 국민대로 넘어가는 고개에서 북악산 쪽으로 오르는 ‘백사실 계곡’과 더불어 조선시대 한양의 오랜 등산코스였다.

칠레 수도 산티아고에 산크리스토발 성모동산이 있고 미국 로스앤젤레스(LA)에 비버리 힐스와 말리부, 산타 모니카해변 등 명소가 있다면 서울에는 걸어갈 수도 있는 인왕산, 북악산, 청계산, 관악산 등이 있다.

웅장함이나 장엄함에는 세계적 명소에 못 미치지만 접근성이나 세심한 멋은 절대 뒤지지 않는다. 더욱이 내려오면 곧바로 우리의 삶과 접할 수 있는 서촌과 북촌의 시장과 식당들이 즐비해 주말 하루 가족이나 친구들과 함께 허적허적 갔다 올 수 있는 최적의 장소다.

1시간여의 산행에 윤동주시비가 있는 언덕의 ‘시심정’(詩心亭)에서 내려다보니 왼쪽으로 청와대 앞쪽에는 서촌마을과 경복궁 기와집들이 보인다.

조선 말기의 화가 겸재 정선(鄭敾)이 자주 온 이유를 알 것 같다. 수성동계곡은 비 내릴 때 도심 산책을 즐기기에 완벽한 코스다. 여름에 비가 오면 작은 계곡으로 물이 몰려 콸콸 물소리가 들려 ‘수성’(水聲)이란 이름을 얻었다. 동(洞)은 지금은 마지막 행정단위로 쓰이고 있지만 계곡물(水)이 한곳으로 몰리는(洞) 뜻이다. 여기에 사람들이 몰려 마을이 된 거다.

청와대 동쪽의 북촌이 남산골의 남촌의 대치개념이라면 수성동계곡 밑의 옥인동 누상동 누하동 체부동 통의동 효자동 청운동 등을 합친 서촌은 북촌과 강북 지역에 어깨를 나란히 한다. 이곳에서 세종이 태어났고 효령대군, 안평대군의 생가 터와 역사가 있다. 근현대에는 윤동주시인의 하숙집 터와 통의동 보안여관, 대오서점 등 곳곳에 남아있다.

▲ 서울 종로구 청운동 윤동주 문학관을 찾은 시민이 시인의 사진 등 일상을 담은 전시물을 관람하고 있다./뉴시스

길을 다 올라 청와대쪽으로 내려가니 1968년 1월 21일 김신조 일당이 청와대를 습격하려다 이를 막다 사망한 종로경찰서장의 동상이 우뚝 선 자하문 길을 만날 수 있었다. 여기에 ‘윤동주(尹東柱)문학관’이 있다.

2010년 10월 21일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31호로 지정됐다. 이 계곡은 조선시대에 선비들이 여름철에 모여 휴양을 즐기던 계곡이다. 정선의 <장동팔경첩>(壯洞八景帖)에 <수성동>이 등장한다. 장동은 효자동과 청운동 일대의 옛 지명이다.

이곳에 한국전쟁 후 옥인아파트가 세워졌다가 철거돼 계곡이 다시 드러났다. 계곡 길이는 200m에 못 미치지만 하류에는 과거의 모습을 간직한 돌다리인 ‘기린교’(麒麟橋)가 남아있다. 정선이 선비들이 놀고 있는 이 다리주위를 그린 그림이 표지판에 새겨져 있다.

인왕산의 작은 물줄기는 수성동과 옥류동(玉旒洞)으로 나뉘어 흐르다 기린교에서 합류해 지금은 포장된 옥인동 골목으로 지난다. 이 물이 정부종합청사 옆의 종교교회와 세종문회회관에서 종로빈대떡 골목을 거쳐 광화문 네거리를 지나 삼청동에서 동십자각, 교보빌딩 뒤로 흘러온 중학천과 합친다. 이어 죄인들을 처벌하던 혜정교(惠政橋)를 넘어 동아일보를 돌아 청계천의 시발지가 된다.

수성동계곡은 조선시대 역사지리서인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考), <한경지략>(漢京識略) 등에서 ‘명승지’로 소개됐다. 18세기에는 정선의 산수화와 조영석의 인물화(풍속화)가 최고였다.

겸재는 ‘진경산수화’라는 우리 고유의 화풍을 개척해 그의 그림 중 가장 유명한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에서 비 온 뒤 안개가 피어오르는 인왕산을 포착하여 물기가 가득하고 깨끗하게 그려냈다. 그의 <장동팔경첩>에 들어있는 계곡 초입의 1.5m 내외의 ‘기린교’ 쌍다리는 한양 도성 내에서 유일하게 원형 그대로 보존된 통돌로 만든 다리다.

계곡 위쪽으로는 소나무와 자귀나무, 산사나무 등이 벚꽂, 싸리나무, 조팝꽃 등과 어울려 울창한 봄숲을 이뤄 싱그러운 기운을 뿜어낸다.

인왕산을 배경으로 아름다운 경관 덕분에 조선시대 최고의 문인과 화가들이 시를 짓고 그림을 그렸다. 조선시대에는 ‘기린교’에 그려진 대로 선비들의 여름 탁족회(濯足會)를 즐기는 곳이었다. 운동을 위한 등산 개념이 없던 시대여서 놀이나 휴양을 위해 하인들에게 술동이나 안주 을 지워서 함께 찾았으리라.

▲ 복개된 옥류동천길의 모습.

인왕산을 넘어 있는 백사실 계곡은 문화사적인 백석동천(사적 제462호)과 자연환경이 잘 어우러져 도롱뇽, 개구리, 버들치, 가재 등이 서식하고 있다. 1급수 지표종인 '도롱뇽'은 서울시 보호 야생동물로서 백사실 계곡에 집단으로 서식하고 있어 그 보존가지가 높다. 백사(白沙) 이항복의 별장터가 있어 붙은 이름이라고 전해지지만 ‘흰 물줄기’(白沙)라는 뜻일 게다.

이곳은 양반들의 전유물만이 아니었다. ‘서촌’ 일대는 조선 후기 역관이나 의관 등 전문직 중인층을 중심으로 한 ‘위항문학’(委巷文學)의 주 무대였다는 점에서 문학사적으로도 의미가 있다. ‘여항문학’(閭巷文學)’이라고도 하는데 양반 사대부들이 한자를 빌려 그들의 정서와 생활감정을 표현한 상층계급의 예술활동이었다. 그러나 18세기부터는 중인 이하 상인·천인까지 포함하는 하급계층이 참여한 대중문학이다.

이 흐름이 사직동 출신의 이상(李相)과 연희전문을 다닐 때 이곳에서 하숙을 했다는 윤동주로 이어졌으리라. 만주 용정(龍井) 출신으로 연희대학을 거쳐 일본 도시샤(東祉社)대학 재학시절 독립운동혐의로 체포돼 해방직전인 1944년 옥사한 그는 서울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는 이곳에 하얀 단층 건물의 아담한 문학관으로 되살아났다.

이곳에서 물길을 따라 옥류동천을 지나 광화문 네거리에서 염상섭(廉尙燮), 박인환(朴仁煥 )등 근현대 문학으로 이어지지 않았을까?

※ 남영진 논설고문은 한국일보 기자와 한국기자협회 회장, 미디어오늘 사장, 방송광고공사 감사를 지내는 등 30년 넘게 신문·방송계에 종사한 중견 언론인입니다. [이코노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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