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영진의 청호칼럼

[이코노뉴스=남영진 논설고문] 지난 2월16일은 김수환추기경 선종 10주년이었다. 가톨릭에서는 이에 맞추어 명동성당에서 염수정추기경이 집전하는 추모미사를 올렸다.

▲ 남영진 논설고문

18일에는 마침 창립10주년을 맞는 한국가톨릭작곡가협회도 명동성당에서 12명의 작곡가들이 평소 김 추기경이 자주 강론의 주제로 삼았던 나눔 평화 생명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노래로 표현했다. 이날 주제가 김추기경이 남긴 “사랑이 머리에서 가슴으로 내려오는데 70년이 걸렸다”는 말씀이었다.

가톨릭계만 아니라 일반 언론에서도 10주년을 맞으며 그의 생애와 신앙, 그리고 군부독재시대에 사회정의를 위한 적극 참여 등을 기사와 영상으로 내보냈다. 마침 2월말 한반도의 평화의 길을 만들기 위한 제2차 북미정상회담이 예정되어있다. 살아생전 서울대교구장과 75년부터 평양교구장서리를 함께 맡았던 김추기경의 한반도 통일을 위한 염원이 이번 회담에서 어느 정도 이루어지도록 모든 국민이 지켜보던 터라 더욱 그의 부재가 아쉽게 다가왔다.

필자가 김수환 추기경을 처음 뵌 건 고1때인 1970년이다. 주교서품 후 66년 마산교구장이 됐다가 2년 만에 68년 서울대교구장에 맡아 다음해인 69년 바오로6세 교황으로부터 막 추기경을 임명받은 때였다. 당시 나는 추기경이 가톨릭 내에서 어떤 위치인지 잘 몰랐다. 거의 ‘성인’에 가까운 직책이려니 생각했다. 시골 황간 성당에서 초등학교 4학년 때 영세를 받고 6학년 때 견진성사까지 받았다. 중학교를 서울로 올라와 제기동, 이문동 성당을 다녔으나 주일미사도 잘 나가지 않은 ‘사이비’신자였으니까...

개신교계통의 중,고등학교를 다녀 학교에서 성경을 배우고 미사 대신 전교생이 수요일 아침예배를 드렸다. 중 3년간은 이 채플시간이 싫었다. 고교에 진학하자마자 쉬는 시간에 선배가 교실에 들어와서 쎌(CELL)이라는 천주교모임이 있으니 가톨릭신자들은 가입하라는 권유를 받았다. 바로 가입해 서울대교구 산하의 고교연합회 임원으로 추천됐다. 그해 여름방학 가톨릭대학생연합회와 중고등연합회가 수원에 있는 서울농대에서 4박5일의 학생대회를 가졌다.

▲ 김수환 추기경 선종 10주기 추모 미사가 지난 16일 서울 중구 명동성당에서 신자들의 기도속에 열렸다. /뉴시스

이 행사에 ‘추기경님과의 만남’이라는 자리가 있었다. 흰 색 수단(긴 사제복) 붉은 주케토(둥근 모자), 클레지망(성직자 조끼)을 멋지게 입은 추기경님을 보니 마치 성인 같았다. 근엄한 안경을 쓴 젊은 김추기경은 학생들과의 대화에 격의가 없었다. 눈가에 잔주름이 잡히는 웃는 모습은 시골에서의 가까운 아저씨 같았다. 코에서 입으로 이어지는 인중이 유난히 길어 입술이 튀어나 보였다. ‘인중이 길면 장수한다는데...“라는 생각이 들었다. 79세까지 사셨으니 장수한 셈인가?

2번째 만남은 유신시절인 1975년 대학3학년 때였다. 박정희대통령의 3선 개헌에 이은 유신헌법 선포로 다시 군부독재시대로 들어갔다. 1971년 가톨릭대학생총연합회(총연)가 주최한 김지하 연출의 ’금관의 예수‘라는 연극이 전국을 돌고 마지막으로 남산 중앙정보부 바로 코앞의 드라마센터에서 공연돼 ’딱‘ 걸렸다. 당국은 반체제 작품이라고 김지하를 전국에 수배하고 당시 지도신부였던 박상래신부를 조사하면서 천주교회에 총연 해체를 압박했다.

당시 주교회의 의장이셨던 김수환추기경은 반대하셨지만 보수적 색체가 강했던 대구, 부산, 대전 등 교구장들이 해체를 요구해 72년 추계주교회의에서 대학생전국단체인 총연을 해체키로 결정했다. 그러나 2년만인 74년 겨울방학때 서울 부산 대구 대전 인천 전주 광주 마산학생연합회 회장단모임에서 총연 대신 가톨릭대학생전국협의회(전협)을 결성했다. 이때 서울학련이 참석도 하지 않은 나를 초대회장으로 추천해 다른 학련으로부터 승인을 받았다.

난감했다. 법대생이어서 이제 고시공부를 시작해볼까 하는데 전국회장으로 추천됐으니 집안의 반대는 물론 앞으로의 시련에 대한 걱정이 앞섰다. 이때 주교 세분이 축하 사신을 서울 대학로에 있는 가톨릭회관으로 보내왔다. 김수환추기경과 원주의 지학순주교, 인천교구장 미국메리놀 선교회의 나귤리엘모 주교였다. 물론 창립된 지 얼마 안된 평신도사도직협의회 김기철회장의 격려편지도 뒤따랐다. 나는 이들의 격려에 힘을 내어 맡았다.

가톨릭전국단체는 주교회의 승인이 없으면 활동할 수 없기 때문에 반대하는 주교들을 설득해 인준을 받는 것이 급했다. 반년만인 75년6월 총재주교였던 대전교구장 고 황민성주교가 허락해 전국단체로 활동할 수 있었다. 이 해에 우리기독교학생연맹(KSCF),YWCA등 종교 3단체가 공동주최해온 ’부활과 4월혁명‘이라는 행사를 기획했다. 당국은 대학생모임은 불허했지만 명동성당에서의 부활절미사에 이은 행사는 묵인했다. 결국 중정이 ’월남패망‘등을 구실로 끈질기게 방해해 무산됐지만.

세 번째는 64년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열어 가톨릭의 현대화를 이룩한 바오로6세 교황의 서거 직후였다. 1년간 전협회장 활동후 곧바로 방위소집을 받아 군역을 마쳤다. 교황청 산하의 학생조직인 팍스 로마나(PAX ROMANA)에서 스페인의 바야돌리드에서 열리는 78년 세계학생대회에 한국의 대표가 참석하라는 초청장을 보내왔다. 당시는 군에 안 갔다 오면 해외여행이 불가능해 할 수 없이 복학4학년생인 내가 10여년 만에 한국대표로 추천됐다.

중고등 지도신부였던 김운회(주교,현 춘천교구장) 윤루까(대주교, 현 벨기에 켄트대교구장)신부와 함께 여름방학 때 스페인대회에 합류했다. 대회가 끝나고 스페인 가정에 묵을 때 바오로교황의 부음을 들었다. 평범한 아주머니가 ”파파“(PAPA)를 부르며 눈물을 흘렸다. 영어 POPE(교황)가 스페인 이탈리아 등에서는 다 아버지라는 ’파파‘로 불리었다. 로마에서 김신부를 재회했을 때 김수환추기경이 차기 교황후보 10명안에 거론되고 있다는 것을 들었다.

필자는 1984년 성체대회후 그가 88년 만든 한마음한몸운동본부(이사장 유경촌주교)의 이사로 8년간 일해오고 있다. 김추기경은 가난한 나라들을 도와줄 조직을 만들고 이사장으로 활동했다. 국내에서는 헌혈, 장기와 조혈모세포 기증, 자살예방사업을 펼쳐온다. 생전에 각막기증을 서약한 사실이 알려져 선종 후 평소 한해 7만 명이던 기증자가 18만 명으로 급증했다가 지금은 줄어들었다.

그의 교회업적, 사회참여 등 많은 일화들이 ’질그릇 옹기‘처럼 잔잔히 회자되고 있다. 나에겐 역시 ”사랑이 가슴까지 평생 걸린 사랑 실천“이 ’바보‘같이 온화하게 웃는 40년 전 수원농대에서 뵌 첫 모습이 가장 강렬히 남아있다. 경북 군위군 옹기골 출신인 그의 호가 ’옹기‘이며 선종 후 ’바보의 나눔‘재단이 설립된 배경이다.

 

※ 남영진 논설고문은 한국일보 기자와 한국기자협회 회장, 미디어오늘 사장, 방송광고공사 감사를 지내는 등 30년 넘게 신문·방송계에 종사한 중견 언론인입니다. [이코노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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