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태의 신간서평

[이코노뉴스=김선태 편집위원] “사람들은 의미를 제공해주는 정체성을 갖기 위해 상상적인 경로를 통해 면역성을 구축한다. 자신에 대한 걱정이 무의식적으로 적에 대한 갈망을 일깨운다. 적은 상상적인 형태 속에서도 신속하게 정체성을 제공해준다. 적은 우리 자신의 문제가 형태화된 것이다. (…) 그것은 암세포처럼 무한정한 창궐, 과잉성장, 전이를 통해 확산된다.” - 『타자의 추방』, 한병철, 문학과지성사, 26-27쪽.

전후 패전 국가 일본이 만들어 낸 기민(棄民) 정책의 망령이 일본 열도, 특히 요코하마 항구 앞 크루즈선 다이아몬드 프린세스호 상공을 배회하고 있다.

▲ 『인간에 대한 오해』, 스티븐 제이 굴드 저, 김동관 역, 사회평론

아베정부가 지난 2월 3일 요코하마 항에 정박한 프린세스호의 입항과 탑승자들의 하선을 고집스럽게 거부하는 가운데, 일본 내 코로나19 감염 확진자는 날마다 수십 명씩 늘어나 2월 17일 현재 414명으로 집계됐다.

무엇보다 승객과 승무원 총 3711명을 태운 프린세스호의 상황이 심각한데, 일본 정부가 이날까지 줄곧 의료진의 선내 진입을 막은 채 선별적인 진단만 허용해온 데다 객실 서비스를 맡은 선원들에게 방호복을 지급하지 않는 등 방역 대책까지 소홀히 한 탓에 선상 감염자가 355명에 이르렀다.

급기야 17일 새벽 미국이 자국민 300명을 귀국 전세기로 탈출시키는 등 여러 국가들이 개입하는 실정이고 우리 정부도 14명의 우리 국민을 구하고자 대책 마련에 나섰다.

지역사회 감염에 노출된 일본

그러한 가운데 일본 열도는 지난 주말부터 경로를 알 수 없는 지역사회 감염으로 다시 충격에 빠져 들었다. 도쿄의 한 유람선 탑승자 11명이 코로나19 확진 판정을 받는 등 감염자가 다양한 지역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증가하고 있어 사실상 일본 전역이 바이러스에 무방비로 노출된 셈이다. 현재 일본은 바이러스 진원지인 중국을 제외하면 가장 많은 환자수를 기록 중이지만 아베 정부는 뚜렷한 대책을 내놓지 못한 채 허둥대고 있다.

경제 강국이라 자부하는 일본에서 어쩌다 이런 일이 생겼을까? 우리가 일본의 상황에서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점은 무엇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약자를 경시하는 사회 풍조와 전염병 감염자를 혐오하는 태도, 여기에 정부의 근거 없는 허세가 더해져 허술한 방역에 안주하면 국력을 불문하고 신종 바이러스에 당할 수밖에 없음을 오늘 일본의 사례가 잘 보여주고 있다.

이와 관련 지난 13일 교통방송 ‘김어준의 뉴스공장’에 출연한 일본 게이센여학원대 이영채 교수의 발언이 널리 회자된 바 있다. 이 교수는 인터뷰에서, 프린세스호 입항 거부 사태는 역대 일본 정권이 고수해 온 기민(棄民) 정책, 즉 “재난을 당해 고립된 국민은 버려도 된다”는 정책의 산물이며 이에 동조하는 일본 국민들 역시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고 주장했다.

이를 뒷받침하듯 14일 YTN 인터뷰에서 세종대 호사카 유지 교수는 여론조사에 따르면 일본 국민들의 70%가 크루즈선 하선 반대에 동조하는 것으로 나타났다며 안타까움을 표했다. “개인의 즐거움을 누리기 위해 배에 올랐다 변을 당한 것이니 그들 각자가 책임을 져야 하며 정부가 책임질 일은 없다”는 것이 일본 국민 다수의 생각이라는 설명이다.

호사카 교수는 특히 물에서 재난을 당한 프린세스호 사태에 대해 일본에서는 “물 위에 고립시켜 버린다”는 의미의 미즈기와(水際) 정책이라는 매뉴얼로 대응하고 있다고 부연 설명했다. 외적의 열도 상륙 저지를 위해 고안한 군사 정책을 바이러스에 감염될 가능성이 있는 자국민에게 적용했다고 보는 것이다.

기민 정책 고수, 사태 악화시켜

크루즈선의 해상 격리가 섬나라인 일본의 특성을 반영한 미즈기와 정책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이는 다시 역사를 거슬러 2차 세계 대전의 전범국이자 패전국인 일본 특유의 기민 정책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설명이 가능하다. 이를 구체적으로 살피면 대략 아래와 같다.

패전 직후인 1945년 8월 14일, 일본 외무성은 ‘3개국 선언(일본에 항복을 요구한 포츠담선언) 수락에 관한 전보 훈령’에서 “해외 거류민은 가능한 한 현지에 정착시킨다”는 방침을 재외 공관에 지시했다. 당시 해외 거주 일본인은 약 660만 명가량인데 그들이 일거에 귀국하면 국내에 혼란이 초래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이어진 9월 24일 차관회의에서 일본 정부는 이를 더욱 구체화하여 “해외부대 및 해외국민에 대해서는 극력하게 해외에 잔류시킨다”고 결정했다.

이후 상당 기간 일본 정부는 자국민의 송환을 통한 안전과 보호라는 국가적 의무 대신 잔류와 정착을 강제하는 ‘현지잔류 유도’ 방침을 고수했다. 이것이 굳어져 이후 일본 특유의 기민(棄民) 정책으로 자리잡았다.

당시 기민정책의 해악은 해외잔류 당사자들에게는 말로 다 할 수 없는 것이었으니, 재중국 일본인의 경우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물론 1953년부터 1957년까지 중국 거주 자국민 중 3만5000명가량을 귀국시키는 등 일본 정부가 전혀 무심했던 것만은 아니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경제성장이 본격화된 1959년 3월 일본 정부는 ‘미귀환자에 관한 특별조치법’을 시행, 중국에 거류하고 있던 자국민 약 1만3600명에 대해 ‘전시사망 선고’를 내렸다. 국가가 개인의 생존여부를 결정한다는 법을 만들어 그들의 호적을 말소하고 귀환을 강제 종료시킨 것이다. 한국전쟁 특수에 힘입어 요행으로 강대국 반열에 오른 일본이기에 패전의 산물인 재외국민의 존재가 부담이었기 때문이리라.

그리하여 중국에 남은 잔류일본인들은 중일국교정상화가 이루어진 1972년에 이르기까지 고국으로부터 버림받았고 이후의 귀환 과정도 지지부진했다. 당시 일본 정부가 ‘고향방문 자비부담 및 내국인의 신원보증’ 원칙을 내세우는 등 소극적인 태도로 일관하자 8개월 뒤 보다 못한 저우언라이 중국 총리가 일본인들의 고향 방문을 지원하겠다고 나설 정도였다.

무엇보다 일본인 고아와 여성들이 수십 년간 방치되어, 2016년 8월 31일 기준으로 중국잔류 일본인 고아의 수가 2818명인데 그중 신원이 확인된 경우는 1284명에 불과했다. 일본 정부가 “중국잔류일본인은 외국인”이라는 방침을 지속적으로 유지한 결과다. 일본은 이처럼 잔류 고아에 대해 시종 무시하는 입장을 취하면서도 2차 대전의 자국 전범을 귀환하는 문제에는 집요하게 매달리는 이중성은 버리지 않았다.

안타까운 것은 일본 국민들조차 자국 정부의 방침에 따라 미귀환자들을 ‘구제’하는 대신 ‘애도’하는 태도를 취하여 전국 각지에 척혼비 또는 위령비를 세우고 생사여부도 확인하지 않고 사자(死者)의 이름을 새겨 넣었다는 사실이다. 이 때문에 중국인과 결혼한 채 귀국한 자국 부인에 대해 이웃들이 ‘부끄러운지도 모르고 살아서 돌아왔다’고 욕하는 일이 심심치 않게 벌어졌다고 한다.

패전과 더불어 국가로부터 버림받아 현지인들에게 의탁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었던 여성들이 고국에 돌아가 비관 자살했다는 소식이 줄을 이었다. 단적으로 1956년 이후 1년간 귀환한 일본 부인 1100명 중 자국에 영주한 이는 110명에 지나지 않았다.(이상 사실관계는 ‘이초희, 「전후 중국잔류일본인의 귀환에 관한 연구-기민정책을 중심으로」(2017, 고려대학원 석사논문)’ 참고)

더욱 소중해진 인간 존중과 연대의식

요코하마 해상 크루즈 선에 감금된 채 집단 감염 상황에 놓인 자국민에 대해 아베 정부가 내세운 상륙 불가 방침, 그것을 수수방관하며 한 발 더 나아가 이를 지지하는 일본 국민 여론. 그 배경에 수십 년 기민 정책의 역사가 자리하고 있음을 이상과 같이 살폈다. 크루즈 선상의 승객들이 선택의 여지없이 패전국 난민 취급을 받으며 해상잔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가운데, 아베 정권은 물론 일본 국민들마저 본토인 행세를 하며 그들의 귀환을 배척하게 된 저간의 사정이다.

물론 지금은 코로나19가 여전히 맹위를 떨치는 중이고, 그 변이도 그 변종도 지속적으로 인류를 위협할 조짐을 보이는 중이다. 일반적인 생명체와 비교할 때 그리고 인간의 경쟁자로서 볼 때 바이러스의 특징이자 무기는 오직 자신의 핵산만으로 감염된 세포를 약탈해 증식하는 고효율의 복제 능력에 있다.

더욱이 코로나19와 같은 RNA 기반 바이러스는 이중나선 DNA의 도움을 받지 않고 신속히 자기복제를 이룰 뿐만 아니라 항체의 공격에 맞서 가공할 돌연변이 능력으로 변종을 만들어내므로 인간이 이를 절멸하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21세기 들어 인구 증가와 환경 파괴의 속도가 역사상 어느 때보다 빠르게 진행되고 있어, 이대로라면 그 반대급부로 인류에 대한 바이러스의 공격 또한 전례 없이 강화될 것임을 예상하기가 어렵지 않다.

하지만 이처럼 비관적인 전망에 대응하는 각국 정부와 시민들의 어떠한 행위도 인간 존중과 연대의 정신, 이 모두를 포함한 인류애의 고귀함과 소중함을 조금도 훼손시킬 수 없을 것이며, 역으로 이를 더욱 강고하게 지켜야 함을 증명해줄 것이다. 약자에 대한 기피와 격리가 당연시될수록 국가‧정부‧사회‧개인의 대처 능력이 떨어지고 경험의 공유 기회가 줄어들어 그만큼 범지구적 감염과 확산의 위험이 커진다는 단순한 이치에서다.

바이러스에 감염된 환자가 우리와 다른 사람이 아니듯, 요코하마 해상에 고립되어 감염에 내몰린 승객들, 우한시-후베이성에서 고군분투중인 주민들 역시 우리와 다른 사람이 아니다. 그들을 우리와 다른 무엇, 이를테면 해상유민, 잠재감염자, 피해유발자, 열등국민 등으로 규정짓고 차별하고 혐오하며 격리되어야 마땅한 존재로 보는 사고는 필연적으로 더 큰 불행을 야기한다. 지금 일본의 사례가 이를 잘 말해주고 있지 않은가.

우리가 보기에 한없이 기괴한 일본의 기민정책이란 것도 그 출발점은 패전국의 실체를 부인하고자 자국민의 일부를 해외잔류민으로 규정한 데 있다. 이처럼 우리가 자신보다 약자의 처지에 놓인 주위 사람들을 경멸하고 배척하며 인격적이고 유전적인 동등성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모습에 대해, 진화생물학자 스티븐 제이 굴드는 존 스튜어트 밀의 다음과 같은 말로 설득한다.

“그것이 무엇이든 이름을 부여받은 것은 실체, 즉 ‘존재자이고 그 자체로 독립된’ 실체를 가진다고 믿는 경향은 항상 강했다. 그리고 정작 명칭에 해당하는 참된 실체를 발견할 수 없을 때조차 사람들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보다는 무언가 특별하게 심오하고 신비스러운 것이 존재한다고 상상하곤 했다.”- 『인간에 대한 오해』, 스티븐 제이 굴드 저, 김동관 역, 사회평론, 506쪽. [이코노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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